「パク・テギュンのベトナム戦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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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을 넘어 북한 부대를 공격하라”

“休戦ラインを越えて北朝鮮部隊を攻撃しなさい”

[토요판]박태균의 베트남전쟁 / (3) 두 개의 전선

[土曜版]パク・テギュンのベトナム戦争/(3)二つの電線

▶ 박태균 서울대에서 경제개발계획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역사와 대중의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서 한-미 관계, 남북관계 등 한국 현대사 주요 사건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해왔다.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20세기 또하나의 전쟁 베트남전쟁이 한국과 세계에 남긴 발자국을 격주로 풀어낸다.

▲パク・テギュン ソウル大で経済開発計画で博士学位を受けた歴史学者. ソウル大国際大学院副教授. 歴史と大衆の疎通のために努力しながら韓-米関係、南北関係など韓国現代史主な事件の実体を明らかにするために孤軍奮闘してきた。 <朝鮮戦争>という本を書いた。 20世紀もう一つの戦争ベトナム戦争が韓国と世界に残した足跡を隔週で解きほぐす。

1966년 10월31일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을 방문했다. 마닐라에서 베트남전 참전국 정상회담을 한 뒤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방문은 파격적이었다. 다른 미국 대통령들은 길어야 이틀, 어떤 경우에는 반나절이었는데, 그는 장장 3일이나 한국에 머물렀다. 새로운 신조어도 만들었다. 바로 ‘존슨탕’이다. 미군부대를 방문하여 소시지와 햄이 잡탕이 된 부대찌개와 비슷한 음식을 맛본 뒤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찌개의 이름은 ‘존슨탕’이 되었고, 부대찌개에 존슨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66年10月31日米国大統領ジョンソンが韓国を訪問した。 マニラでベトナム戦参戦国首脳会談をした後米国で帰っていく道だった。 彼の訪問は破格的だった。 他の米国大統領は長く持って二日、場合によっては半日であったのに、彼は長々3日や韓国に留まった。 新しい新造語も作った。 すぐに‘ジョンソン汁’だ。 米軍部隊を訪問してソーセージとハムがごった煮になったプデチゲと似た食べ物を味わった後おいしいと賞賛を惜しまなかったという。 そのチゲの名前は‘ジョンソン汁’になったし、プデチゲにジョンソン汁という名前がついたという。

방문 기간 중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군사분계선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습격했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계획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대규모였다. 미군 6명과 한국군 카투사 1명이 사망했다. 당연히 미군에는 비상이 걸렸다. 브이아이피(VIP)가 한국에 왔을 때 북한군이 움직인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비무장지대(DMZ)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訪問期間中大型事故が発生した。 軍事境界線北朝鮮軍が米軍を襲撃した。 単純な攻撃ではなかった。 計画的だと考えられる程大規模であった。 米軍6人と韓国軍カツサ1人が死亡した。 当然米軍には非常事態になった。 プイアイピ(VIP)が韓国にきた時北朝鮮軍が動いたのだ。 ジョンソン大統領は非武装地帯(DMZ)からいくら離れていないソウルに留まっていた。

존슨을 가장 당혹하게 했던 푸에블로호 납북

ジョンソンを最も当惑するようにしたプエブロ号北へ拉致

주한미군에 비상이 걸렸다. 미국에 대한 전쟁 선언이라고 해도 될 만한 도발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즉각 조사에 들어갔다.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인가? 1958년 이후 남한의 미군부대에 핵무기가 설치되어 있는데도 말인가?

駐韓米軍に非常事態になった。 米国に対する戦争宣言といってもかまわないほどの挑発だった。 駐韓米軍司令官は直ちに調査に入った。 北朝鮮の意図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 米国に宣戦布告をしたものか? 1958年以後韓国の米軍部隊に核兵器が設置されているのにも話か?

조사 결과는 의외였다. 북한군의 도발은 그 이전에 있었던 한국군의 북한 부대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닷새 전인 1966년 10월26일, 한국군이 북한의 연대 사령부를 공격해서 연대장을 비롯한 상당수의 북한군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기 5일 전의 일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정일권 총리에게 항의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調査結果は意外であった。 北朝鮮軍の挑発はその以前にあった韓国軍の北朝鮮部隊攻撃に対する報復だった。 五日前の1966年10月26日、韓国軍が北朝鮮の連帯司令部を攻撃して連隊長をはじめとする相当数の北朝鮮軍が死亡したということだ。 ジョンソン大統領が韓国を訪問する5日前のことだった。 駐韓米軍司令官はチョン・イルグォン総理に抗議して再びこういう事があってはいけないと警告した。

사실 1966년 존슨 대통령 방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감사가 담겨 있었다.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한국이, 그것도 전투부대를 보내준 것이다. 그 규모 역시 1000명도 안 되는 군대를 파병한 타이(태국)·필리핀·오스트레일리아(호주) 등 다른 나라에 비교가 안 될 만큼 큰 규모였다. 존슨의 ‘더 많은 깃발’ 정책에 호응해 준 대가였다. 물론 실제 방한 이유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事実1966年ジョンソン大統領訪問にはパク・チョンヒ大統領に対する監査(感謝)が含まれていた。 最も近い同盟国である英国とフランスもベトナムに派兵しなかった状況で韓国が、それも戦闘部隊を送ったのだ。 その規模やはり1000人もならない軍隊を派兵したタイ(タイ)・フィリピン・オーストラリア(オーストラリア)等他の国に比較にならない程大きい規模であった。 ジョンソンの‘より多くの旗’政策に呼応した代価であった。 もちろん実際の訪韓理由は韓国軍戦闘部隊の追加派兵を要請するためのものだったが。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에 초대하여, 지금의 한국 대통령은 꿈도 꿀 수 없는 뉴욕에서 카퍼레이드를 마련해 주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설립을 선물로 주었던 존슨 대통령의 3일간 방문은, 한국과 같이 미국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라에서 그 지도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방문 마지막 날에 있었던 북한군의 공격은 제대로 초를 친 것이다. 그 원인 제공자가 한국군이었으니 문제는 더 심각했다.

1965年パク・チョンヒ大統領を米国に招いて、今の韓国大統領は夢も見ることはできないニューヨークでカーパレードを用意したし、韓国科学技術研究所(KIST)の設立をプレゼントに与えたジョンソン大統領の3日間訪問は、韓国のように米国ならば目がない国でその指導者に与えることができる最高のプレゼントだった。 ところで彼の訪問最後の日にあった北朝鮮軍の攻撃はまともに酢を加えたのだ。 その原因提供者が韓国軍であったから問題はさらに深刻だった。

1966년에 발생한 이 사건은 그 이후 사건들의 전초전에 불과했다. 1965년과 1966년 한 해 30~40여건에 불과했던,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남북한 사이의 교전은 1967년에는 400회를 넘어섰고, 1968년에는 1년간 500여회에 달하도록 급증했다. 거의 전쟁에 가까운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베트남에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있었다.

1966年に発生したこの事件はその後事件の前哨戦に過ぎなかった。 1965年と1966年一年30〜40件余りに過ぎなかった、非武装地帯で起きた韓国、北朝鮮の間の交戦は1967年には400回を越えたし、1968年には1年間500回余りに達するように急増した。 ほとんど戦争に近い状況が展開したのだ。 ベトナムでそれだけでなく韓半島ももう一つの電線が形成されていた。

1967년 12월 주한미군 사령관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반도에서 게릴라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공세적 전략이 단지 도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게릴라 부대를 남파해서 베트남과 같은 게릴라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제2의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도 있다고 발표했다.

1967年12月駐韓米軍司令官とキム・ヒョンウク中央情報部長が記者会見を行った。 韓半島でゲリラ戦争が発生する可能性があるということだった。 北朝鮮の攻勢的戦略が単に挑発で終わるのではなく大規模ゲリラ部隊を南へ派遣(南派)してベトナムと同じゲリラ戦争が起きる可能性があって、第2の朝鮮戦争勃発の可能性もあると発表した。

1967년 12월의 한국 신문들은 전쟁 전야에 발간된 신문 같았다. 북한의 공세에 대한 기사가 연일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 와중에 12월25일 북한은 미군 함정을 나포했다는 긴급 방송을 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67년 12월26일치) 푸에블로호 사건이 발생하기 정확히 한 달 전의 일이다. 게릴라전에 대한 경고가 이듬해 11월의 울진 삼척 사건을 예고했다면, 이 기사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미리 예견한 것인가?

1967年12月の韓国新聞は戦争前夜に発刊された新聞同じだった。 北朝鮮の攻勢に対する記事が連日新聞に報道された。 その渦中に12月25日北朝鮮は米国艦艇を拿捕したという緊急放送をすることもした。(東亜日報1967年12月26一致)プエブロ号事件が発生すること正確に一ヵ月前のことだ。 ゲリラ戦に対する警告が翌年11月の蔚珍(ウルチン)、三陟(サムチョク)事件を予告したとすれば、この記事はプエブロ号事件をあらかじめ予想したものか?

한국 정부는 1968년 1월6일 비상치안회의를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에서 소집했다. 북한이 어떠한 도발을 할지 모르니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뿐만 아니라 경찰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회의였다. 보름이 지난 1968년 1월21일엔 청와대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그 이틀 뒤엔 동해에서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6년 전의 일이다.

韓国政府は1968年1月6日非常治安会議を第1軍司令部がある原州(ウォンジュ)で招集した。 北朝鮮がいかなる挑発をするかもしれないのでこれに対し徹底的に備え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だった。 グンだけでなく警察関係者たちも参加した。 パク・チョンヒ大統領が直接主宰した会議であった。 半月が去る1968年1月21日には大統領府襲撃事件が発生した。 その二日後には東海で米国の情報艦プエブロ号が北朝鮮によって拿捕された。 今から正確に46年前のことだ。

사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견되었다. 1965년 전투부대 파병을 반대했던 야당은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한국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휴전선에서 한국군의 방위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경향신문 1965년 8월4일치) 실제로 1968년 1월21일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들에 의해 휴전선이 뚫렸고, 이들이 청와대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事実このような事件は全部予想された。 1965年戦闘部隊派兵を反対した野党は韓国戦闘部隊のベトナム派兵が韓国の国際的孤立を自ら招来するだけでなく休戦ラインで韓国軍の防衛力を弱化させることだと警告した。(京郷新聞1965年8月4一致)実際に1968年1月21日北朝鮮軍特殊部隊要員によって休戦ラインがあけられたし、これらが大統領府を攻撃する事件が発生したのだ。

후에 존슨은 1968년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1968년에 일어난 일들 중에서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했던 것은 1월23일이었다. 그날 푸에블로호가 납북되었다.”

後でジョンソンは1968年を回顧しながら次の通り話した。 “途方もない変化があった1968年に起きた仕事のうちで私を最も当惑させたことは1月23日だった。 その日プエブロ号が北へ拉致された。”

1966년 존슨 대통령 방한 중
북한군이 미군을 습격했다
이는 심각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는 5일 전 한국군의
북한 공격에 대한 보복이었다

1966年ジョンソン大統領訪韓北朝鮮軍が米軍を襲撃してこれは深刻な挑発だったしかしこれは5日前韓国軍の北朝鮮攻撃に対する報復だった

베트남전 격화되는 시점에서
한반도 역시 전쟁터가 됐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 것이 아닌가

ベトナム戦激しくなる時点で韓半島やはり戦場になってそれならベトナム戦を通じて安保を強化するという目的は達成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ではないか

미국은 왜 원산을 폭격할 수 없었나

米国はなぜ原産を爆撃できなかったか

당시 미국은 정신이 없었다. 기대와는 달리 베트남에서의 전쟁이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푸에블로호 사건 일주일 후에 있었던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미국 전역을 흔들어 놓았다. 구정공세는 베트콩의 군사적 실패였지만, 정치적으로 미국을 곤경에 빠뜨렸다. 티브이를 통해 베트남의 전선을 지켜볼 수 있었던 미국 사회에서 구정공세를 계기로 반전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当時米国は考える余裕もなかった。 期待とは違ってベトナムでの戦争がそれほど大きい成果を上げられずにいた。 プエブロ号事件一週間後にあったベトコンの旧正月攻勢は米国全域を揺さぶった。 旧正月攻勢はベトコンの軍事的失敗だったが、政治的に米国を苦境に陥れた。 TVを通じてベトナムの電線を見守ることができた米国社会で旧正月攻勢を契機に反戦デモが本格化した。

존슨 대통령에게는 푸에블로호 사건이 더 황당했다. 베트남이 아닌 한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 안에는 미국의 정보활동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푸에블로호에 승선하고 있던 70여명에 이르는 미군들은 북한군에 생포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던 베트남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한반도에서 터졌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인공위성이나 정보초계기가 활동하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국경지역과 배 위에서 상대방의 무전을 도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보활동이었다. 군사분계선에도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한국군과 미군이 있었다. 그중의 정보함 하나가 적에게 나포된 것이다.

ジョンソン大統領にはプエブロ号事件がさらにあきれた。 ベトナムでない韓国でこうしたことが広がるかは夢にも思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だ。 その中(案)には米国の情報活動に関連した多くの内容が含まれていた。 プエブロ号に乗船していた70人余りに達する米軍は北朝鮮軍に生け捕りされた。 戦争が進行されたベトナムでも起きない事件が韓半島でさく烈したのでどれくらいあきれたのだろうか? 人工衛星や情報哨戒機が活動する今とは違って当時には国境地域と腹の上で相手方の無電を盗聴することが最も重要な情報活動だった。 軍事境界線にも情報収集活動をする韓国軍と米軍があった。 その中の情報艦一つが敵に拿捕されたのだ。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어 정박하던 원산항을 폭격하는 방안에서부터 소련한테 압력을 가하여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풀어주도록 하는 것까지 다양한 방안이 논의되었다. 베트남에 발이 묶여 있었던 미국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베트남이라는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와중에 또 하나의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단지 판문점에서 북한과 만나 이들을 풀어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년이 지난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푸에블로호의 선원들이 귀환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북한의 영해에 침범했다고 인정하는 문서를 북한 쪽에 전달했다. 세계 최강 미국으로서 치욕이었다.

プエブロ号が拿捕されて停泊した元山(ウォンサン)港を爆撃する方案からソ連に圧力を加えて北朝鮮がプエブロ号を解くようにすることまで多様な方案が議論された。 ベトナムに足止めをくっていた米国としては何も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ベトナムという沼に落ちてさ迷う渦中にもう一つの戦争を遂行する余力がなかった。 単に板門店(パンムンジョム)で北朝鮮と会ってこれらを解いてくれと言うほかはなかった。 結局1年が過ぎたクリスマスになってプエブロ号の船員が帰還した。 米国はその代価で北朝鮮の領海に侵したと認める文書を北朝鮮側に伝達した。 世界最強米国として恥辱だった。

당시 군사분계선에서 활동했던 한 미군 병사에 따르면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 북한에서의 무선을 도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북한의 납치는 고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며, 미군과 전쟁을 할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 보고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미군이 원산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지 않았던 한 이유였을 가능성도 있다.

当時軍事境界線で活動したある米軍兵士によればプエブロ号事件直後北朝鮮での無線を盗聴できたという。 北朝鮮の拉致は故意によったのではなく、米軍と戦争をする意思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確認して報告したという。 もしかしたらこれが米軍が原産に対する爆撃を敢行しなかったある理由だった可能性もある。

그렇다면 1968년 1월이라는 시점에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그것도 베트남에서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시점에. ‘벼랑 끝 전술’의 대가인 북한이 베트남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미국에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던 것인가?

それなら1968年1月という時点にいったいなぜこういうことが起こったのか。 それもベトナムで真っ最中戦闘が進行される時点に。 ‘瀬戸際戦術’の代価である北朝鮮ベトナム戦のドロ沼から抜け出してくることができない米国にある部屋を食べさせることができる機会をつかんだことなのか?

상황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 우선 북한의 공세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북한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돕는 방법으로 한반도에서 안보위기를 일으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한반도의 안보상황이 불안해진다면 더 많은 한국의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전투 요원의 일부를 북베트남에 보내 직접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한반도에 안보위기를 조성하는 것 역시 측면 지원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호찌민과 가까운 관계였던 김일성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였다.

状況はそんなに簡単でなかった。 まず北朝鮮の攻勢が強化されたものは事実だ。 北ベトナムと緊密な関係を結んでいた北朝鮮北ベトナムとベトコンを助ける方法で韓半島で安保危機を起こす方案を選択した。 韓半島の安保状況が不安になるならばより多くの韓国の戦闘部隊をベトナムに送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だった。 戦闘要員の一部を北ベトナムに送って直接助けるのも一つの方法だったが、韓半島に安保危機を作ることやはり側面支援の方法になることができた。 ホーチミンと近い関係であったキム・イルソンが見せることができる最大限の好意であった。

1966년의 조선노동당 대표자회 직후부터 남한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었다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또한 최근 공개된 동독의 외교문서도 이를 잘 보여준다. 중국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북한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엔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독일지역 북한기밀문서집” 39~43쪽) 이 문서는 한미일 삼각동맹에 의해 미국이 한반도에서 또 하나의 전쟁을 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는 내용이 담겨 있지만, 실상 북한이 베트남을 돕기 위해 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전술을 펼친 것은 분명하다.

1966年の朝鮮労働党代表者会直後から韓国に対する攻勢が強化されたとのこともこれをよく見せる。 また、最近公開された東ドイツの外交文書もこれをよく見せる。 中国政府はベトナムでの状況を有利に引っ張っていくために北朝鮮政府が韓半島国連軍に対する攻勢を強化することを要請することもした。(“ドイツ地域、北朝鮮機密文書集” 39〜43ページ)この文書は韓米日三角同盟によって米国が韓半島でもう一つの戦争をする可能性がないといいながら中国の要求を断る内容が含まれているが、実状北朝鮮ベトナムを助けるためにさらに積極的で攻勢的な戦術を広げたことは明らかだ。

손바닥은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법. 북한의 적극적인 공세만으로 남북한 간의 충돌이 10배 이상 급증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는 남한 정부의 새로운 전술이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6년 10월 존슨 대통령 방한 직전에 있었던 남한군에 의한 북한 공격은 그 신호탄이었다.

手の平はあってこそ音がする方法。 北朝鮮の積極的な攻勢だけで韓国、北朝鮮間の衝突が10倍以上急増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 ここには韓国政府の新しい戦術がもう一つの重要な役割をした。 1966年10月ジョンソン大統領訪韓直前にあった韓国軍(郡)による北朝鮮攻撃はその信号弾だった。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직후에 향후 북한에 대한 전술을 논의하기 위해서 방한한 사이러스 밴스 특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회담한 직후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1967년 이후 발생한 남북 충돌 사건의 3분의 1은 남한 쪽에 의해 발발한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본스틸 장군으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1968年プエブロ号事件直後に今後北朝鮮に対する戦術を議論するために訪韓したサイラス ペンス特使はパク・チョンヒ大統領に会って会談した直後ジョンソン大統領に報告する席で1967年以後発生した南北衝突事件の3分の1は韓国側によって勃発した事件だと言及した。 これは当時駐韓米軍司令官だったボンスティル将軍から得た情報であった。

이진삼 전 의원이 증언한 ‘북한군 33명 사살’

イ・ジンサム前議員が証言した‘北朝鮮軍33人射殺’

1967년 휴전선에서 남북 간의 교전이 급증하면서 주한미군 사령관은 북한이 점점 더 공격적인 전술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에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자주 워싱턴에 보냈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가 북한의 공세에 너무나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때문에 안보위기가 더 격화되고 있다는 내용 역시 전달하였다.

1967年休戦ラインで南北間の交戦が急増しながら駐韓米軍司令官は北朝鮮がますます攻撃的戦術を使っているのでこれに対し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内容の報告書をしばしばワシントンに送った。 これと共に韓国政府が北朝鮮の攻勢にあまりにも積極的に対応するので安保危機がさらに激しくなっているという内容やはり伝達した。

당시 박정희 정부의 전략은 단지 북한의 공세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한발 더 나아가 선제공격(preemptive attack)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적들이 우리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기 위해 적들을 먼저 공격한다는 것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구사했던 전략을 한국 정부가 1960년대에 보여준 것이다.

当時パク・チョンヒ政府の戦略は単に北朝鮮の攻勢に対して積極的に対応するのに終わるのではなかった。 もう一歩踏み出して先制攻撃(preemptive attack)の性格を帯びていた。 敵が私たちを攻撃する可能性があるのでそれを遮断するために敵を先に攻撃するということだ。 2001年9・11テロ以後に米国のブッシー行政府が駆使した戦略を韓国政府が1960年代に見せたのだ。

자유선진당 소속 이진삼 의원(당시)은 2011년 2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한 증언을 통해서 1969년 9월과 10월 3차례에 걸쳐 북한 부대를 공격해서 약 33명의 북한군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관련 자료는 이미 2008년 기무사령부에서 공개되었으며, 그림에서 보는 작전 지도와 같은 “몇배의 응징으로 적이 다시는 오판을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 배경으로서 베트남전 참전을 언급했다.

自由先進党所属イ・ジンサム議員(当時)は2011年2月国会国防委員会である証言を通じて1969年9月と10月3回にかけて北朝鮮部隊を攻撃して約33人の北朝鮮軍を射殺したと主張した。 関連資料はすでに2008年機務司令部で公開されたし、図で見る作戦地図のような“何倍の報復で多少再び誤った判断を出来ないようにするためのもの”と明らかにした。 その背景としてベトナム戦参戦を言及した。

이와 같이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는 시점에서 한반도는 또 다른 전쟁터가 되어갔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 것 아닌가? 심지어 군사분계선이 뚫리고 북한의 게릴라가 청와대까지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은 혹 전투병 파병으로 인한 공백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このようにベトナム戦争が激しくなる時点で韓半島はまた他の戦場に成っていった。 それならベトナム戦争を通じて安保を強化するという目的は達成さ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はないのか? さらに軍事境界線があけられて北朝鮮のゲリラが大統領府まで襲撃する事態が発生したというのはひょっとして戦闘兵派兵による空白のため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 米国の反対にもかかわらず、韓国政府がこのように積極的に対応した理由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부교수

パク・テギュン ソウル大国際大学院副教授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21307.html